雙胎兒의 四柱{535}
命理學의 二大難題가 하나는 四柱가 같은 사람의 運路가 결코 같지 않다는 것과 또 하나는 雙胎兒로서 先後産의 四柱는 어쩔 수 없이 같은데 그들의 運路는 判異하다는 데에 問題가 있는 것이다.
차라리 다른 父母밑에서 태어난 同一四柱의 사람은 行路가 各己 다른 가운데서도 最大公約數를 찾으면 類似點을 發見할 수가 있지만 같은 父母밑에서 태어난 雙胎兒 卽 雙童이들은 行動과 習性의 類似點은 있어도 그들의 運路는 결코 닮지도 않고 같지도 않다.
그러나 이러한 問題 糾明을 爲한 그 어떤 理論定立도 古今의 命理書 가운데서는 찾아볼 길이 없다.
古人은 이 難題點을 命理學의 限界點으로 여겨 아예 손조차 쓰지 않은 건지 아니면 後代의 어떤 奇才의 손에 依해서 풀어질 거라는 莫然한 期待 속에서 餘白으로 設定해 놓은 건지는 알 수 없어도 아무튼 命理學界의 한 未濟事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理致는 결코 하나인고로 萬事萬物의 原理는 一理貫知할 수 있다는 것이 東洋學의 眞髄가 아닌가 한다.
他父母 밑에서 난 사람으로서 四柱가 같은 사람은 同一한 宿命의 暗示를 받으므로 해서 그들의 運路도 꼭 같아야 하겠는데 결과가 조금 다르게 나타나는 것은 父母와 運境의 差異點에서 오는 先天的 優劣條件(핸드캡)에서 定해지는 것이다.{536}
그러기에 中國의 古事에도 裵度와 裵度(배탁)이라고 하는 같은 四柱의 두 主人公이 있었는데 한 사람은 海軍提督이 되고 한 사람은 楊子江 뱃사공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李太祖와 同一四柱의 한 人物이 강원도 정선골에서 養蜂을 經營하는 農軍이었더라는 事實 속에서 우리는 八字라는 宿命的 暗示가 무엇을 示唆하는지를 알 수가 있을 듯하다.
前者의 例에서 海軍提督과 뱃사공과는 富貴貧賤의 差異點으로 보나 人品의 高下로 보나 도저히 겨룰 수조차도 없는 異質的要素를 發見할 수가 있는 거지만 反對로 類似點을 들라면 두 사람 모두가 다 같이 바다와 因緣을 맺고 살아갔다는 點인 것이니 그 理致는 결국 하나로 歸結된 셈이고 다만 貧富貴賤의 差異는 各者 父母가 안겨다준 先天的 優劣條件에 起因한 것이라 하겠고 後者의 例에 있어서도 李成桂와 養蜂業者 사이에는 四柱는 비록 같다 할지라도 天無二日이요 地無二君인데 어찌 감히 임금이 둘 될 수가 있겠으며 萬乘의 至尊과 農夫의 差異야 말로 하늘과 땅 만큼이나 다르다 하겠지만 君王은 三百七十二州를 다스렸고 農夫는 三百七十二통의 養蜂을 業으로 삼고 다스렸으니 이것도 또한 一理貫知의 範疇를 벗어났다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그러나 같은 父母밑에서 태어난 雙胎兒는 같은 四柱를 타고 났으면서도 八字行路에 對한 類似性을 全然 發見하지도 못하고 또 이를 立證할만한 論理的 根據도 없다.{537}
그렇다면 이처럼 기막힌 矛盾이 어디 있단 말인가.
이 點에 關해서 市中의 行術家들 사이에서도 무엇인가를 좀 달리 解釋해 보고자하는 機微가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어서 或者는 先童이에겐 大運歲數를 順計해야 하고, 後童한테는 大運歲數를 逆計해야 한다는 異論을 내세우기도 하지만 어째서 그래야 한다는 窮極的인 理由를 提示하지는 못한 채 莫然하게 主張하는 理說이긴 하지만 그 骨子는 定時는 出生時刻을 基準하여 同一生時로 잡되 다만 大運歲數만을 順逆算置한다는 뜻이고 여기에 反해 老古堂 金某氏의 主張은 좀 더 색다른 데가 있다.
氏는 所謂 沖隔定時法을 主唱하는 사람인데 氏의 持論인즉 雙胎兒는 母胎에서의 位置가 對沖方에 놓이기 때문에 先後童의 生時를 沖隔定時法으로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進一步한 主張이긴 하지만 이러한 氏의 主張가운데서도 넘기 어려운 論理的 矛盾性을 排除하지 못한 故로 자칫 偏見에 빠질 危險性이 있다.
왜냐하면 所謂 氏의 沖隔定時法을 받아들일 경우 이는 단 雙胎兒에 限해서만 收容할 수 있는 理論일 뿐 三胎兒以上의 雙童兒에게는 定時의 根據가 稀薄해 지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외람되지만 筆者의 持論을 開陳한다면 좀더 色다른 理論이 될 수 있을 것이다.
結論부터 말하자면 雙胎兒는 결코 出生時가 같지 않다는 것이다.
이 말은 限定論理속에 묶여 있는 命理學的 理論上으로서는 到底히 收容할 수 없는 異端的 論理가 될지 모르지만 그러나 如斯한 論理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다만 時制의 矛盾에 있을 뿐 五行論으로나 數理論的으로나 다같이 妥當한 論理인 것이다.
窮極的으로 따지고 들면 時間이란 결국 順次槪念의 範疇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봐지는 것이다.
어떤 制度線上의 한 時間帶로서 時의 흐름의 基準을 삼는다면 十一時에 난 사람이나 十一時 三十分에 난 사람이 아무런 差異가 없을는지 모르지만 그러나 이를 順次槪念으로 따져본다면 엄청난 차이點을 發見할 수가 있는 것이다.{538}
그러므로 正常的인 過程으로 태어나는 아이들한테는 十二支時라는 大前提的 時間帶가 그대로 適用돼야 하겠지만 그러나 同一한 時間帶안에서 두 사람 以上이 태어날 때는 分明 狀況을 달리보아 이를 順次槪念에 適用시켜 先童에게는 本時를 後童에겐 借時를 하여 다음 時를 定해 줘야 한다.
假令 같은 寅時라는 大前提的 時間帶안에서 두 사람(또는 그 以上)의 아기가 태어났다면 先童이에게는 寅時를 後童에게는 卯時를 定해야 하고 萬若 이때에 三胎兒가 태어났다면 一二三의 次序에 따라 寅卯辰時까지로 出生時間이 달리 定해져야 된다는 것이 筆者가 提示하는 理論의 骨子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實在로 雙胎兒中 先後童의 四柱를 살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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