五一七(庚申年) 非常措置와 金鍾泌{591}
解斷 十二六以後 우리 社會는 한동안 春秋戰國時代가 無色할 정도로 政治亂場판이 된 적이 있었다.
그때 이 亂場판에 登場한 人物들이 不知己數지만 그 가운데 가장 代表級 人事로는 亦是 三金氏였다고 하겠다.{592}
그들은 當場에 政權이 굴러들어올 것만 같은 錯覺 속에서 大衆을 煽動하고 學生들을 부추겨 거리로 뛰쳐나오게 하느라 血眼이 되고 있을 때 晴天霹靂과도 같은 非常措置가 떨어져 三金을 비롯한 政治主役들은 마치 宿命의 玉樓夢에서 恐怖의 奈落으로 追放 當한 듯 一齊히 自由를 喪失하고 말았으니 저들의 庚申年運을 풀어봄도 無意味한 일은 아닐 것이다.
우선 氏의 庚申年局 가운데서 重要한 部分들을 살펴본다면 歲支의 乘旺한 九金正官이 景門福德을 만나고 中宮七火 子孫이 艮上의 五土偏財와 함께 三殺을 作하여 歲官이 더욱 旺해졌고 月日이 同宮한 채 八木世爻가 居生하여 生門을 逢하니 權力을 追求하는 形의 四柱로서는 꾀나 좋은 運으로 보이지만 그러나 實際에 있어서는 年運의 太歲落空이면 作事無成이라 하겠으며 兌上 偏官이 總空에 떨어져서 權力無常의 敎訓을 남긴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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