五一六의 主役 金鍾泌 乙丑年十一月二十三日
水土作剋에 丁奇가 投出하여 才智가 넘치듯 하다.{452}
中宮 九金 偏印이 上干二火와 時支 三木과 寅巳申 三刑을 作하고 中生日에 日生時하고 時生 歲月하니 四支가 外廓으로는 通氣가 되지만 마지막 歲支와 中宮이 七九相戰으로 부딪히니 極權을 누릴 수가 없다.
假定이지만 歲月支가 動處中의 官殺을 通해서 中印을 生했다면 氏의 人生은 確實히 달라졌을 것이다.
一人之下에 萬人之上이라는 宰相의 자리를 數次례나 거치고 執權黨의 黨議長職等을 고루 거친 氏의 政治官祿이 不足해서 하는 소리가 아닌 것이다.
적어도 五一六 革命을 主導했고 次期 大統領의 자리를 은근히 꿈꿔오던 氏로서는 그러한 大望이 一場春夢으로 끝나버린 오늘에 있어서의 失意와 挫折感을 禁할 수 없겠기에 하는 말인 것이다.
그러나 八字의 歸結은 嚴肅하고도 公正한 것이어서 定命을 어기려야 어길 수 없고 비켜 갈래야 비켜갈 수 없는 天命 그것인 것이다.
電氣란 구십구프로가 接해도 불이 켜지지 않듯 命宮의 五行이 金水木火는 通氣가 되는 反面 단지 火土의 接合이 杜絶되므로서 마치 安全핀이 뽑힌 手留彈마냥 火金이 衝動하는 不祥事(?)를 일으키고만 結果라 하겠고 또한 氏의 政治行脚이 언제나 跛行으로 끝나버린 原因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生死를 걸고 五一六을 主導한 氏의 遊年이 三十四歲에서 四十一歲사이의 八年傷官運이므로 氏가 下剋上 事件에서 豫編된 것도 亦是 無理가 아니며 또 革命에 加擔하거나 主導하기에도 適切한 時期라 하겠다.{453}
五一六 當時의 氏의 나이는 三十七歲였고 以後 四十二歲에서 四十五歲 사이는 杜門 絶體의 官運이라 浮沈이 無常했고 十·二六事態 當時에는 亦 五十五歲로서 遊年은 離上 日干宮의 上干 三木 食傷運으로서 氏의 政治行路에 내려진 遮斷機가 됐던 것이다.
以後 五十七歲에서 六十歲까지가 歲月支宮의 正印運으로서 開門을 만나 한때 運勢가 浮上할 듯 했지만 氏는 이미 歷史의 뒤안길로 밀려난 뒤라 再起를 꾀하기 어려운 狀態라 하겠고 六十一歲에서 六十五歲와 그 後의 運勢가 多少 살아있는 듯하지만 이는 지는 해의 殘光에 不過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辛丑革命을 主導해 온 이른바 革命主體者들의 命局解斷을 좀더 包括的으로 試圖해 보고자 했지만 워낙 資料가 不足해서 뜻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多幸인 것은 비록 여러 사람들의 定命을 解斷해 보고자한 意圖는 이룰 수 없을지라도 그 가운데서도 主體中의 主體라 할 수 있는 氏의 定命을 看評해 볼 수 있는 機會가 있었다는 것은 커다란 收穫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氏 個人에 對한 親疎關係나 好不好의 感情을 떠나서 五一六이라는 한 事件이 歷史에 浮刻된 史的意味를 되새겨 볼 수 있는 한 契機가 될 수도 있겠기에 하는 말인 것이다.
아무튼 五一六이 끼친 우리 民族史的 側面을 두 가지 觀點에서 풀이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 한 가지는 政治的意味이고 그다음 하나는 經濟的意味라 할 수 있겠다.{454}
한 政權을 武力으로 征服하여 이 땅에 武斷政治의 始源을 이룩했다는 點으로 봐서는 民族史的인 不幸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反面 過敢한 經濟政策을 施行하여 五千年以來의 가난을 脫皮할 수 있게 한 跳躍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게 했다는 點에서는 자못 肯定的인 評價를 아니 내릴 수가 없으므로 결국 五一六革命은 歷史的 辨證의 한 循還過程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나 두 번 다시 이 땅에 武力革命이라는 悲劇的 惡循還이 되풀이되지 않아야 하겠으므로 軍이나 政治家 그리고 國民 모두가 大悟覺惺 하지 않으면 안 되리라 생각되어 敢히 蛇足之辯을 添言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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