白斗鎭{439} 戊申年十月七日戌時
氏는 自由黨時節에서부터 共和黨時代에 걸쳐 財界의 重鎭이자 政界의 要職을 두루 거친 巨物級 人事다.
氏의 四柱 命局은 歲日의 五土가 月時의 九金을 生하니 四支는 關通이지만 月時의 食傷이 中宮의 雙官을 沖剋하여 治鬼局을 이뤘는데 이 경우에 있어서는 五行의 變通數가 없는 限 官界進出은 不可한데 氏는 果然 어떻게 그처럼 官運이 좋았을까?{440}
우선 歲日의 五土와 月時上下의 九와 七이 三殺을 作하여 九金이 더욱 强旺해졌는데 이때의 月時上 九金이 歲日上의 一水를 生하므로 中宮 雙官의 沖剋을 避할 수가 있다.
卽 歲日生月時하여 成局되었으며 月支九金이 中宮 三木 偏官을 沖剋하지만 中官이 兼旺이라 上數의 三木은 歲日上의 一水의 生助를 받아 月時上의 七火를 生하여 一種의 以夷制夷法으로서 서로를 牽制하고 있는 現況을 볼 수가 있다.
解放直後에서 政府樹立까지의 氏의 遊年은 四十歲에서 四十一歲까지의 二火(離宮)印綬가 景門生氣를 만났을 때고 氏가 國務總理에 任命된 것은 四十歲때인 檀紀四二八十六年(一九五三)때다.
이때의 遊年은 歲日上 一水財運으로 財生官하므로 官高懸達이 可能했지만 四十七歲에서 四十八歲 사이가 坎上의 二火 印綬가 中官과 三刑인데 空亡을 보므로 總理職에 고작 一年으로 끝났다.
氏가 共和黨政權에서 다시 重任을 맡고 維政會 國會議員이 된 時期는 檀紀四千三百三年(一九七0) 以後부터라 생각되니 그때의 遊年이 月時支上干七火印綬運이었으니 六十二歲에서 六十八歲 사이가 된 것이다.
그리고 다시 國會議長이 되어 野黨議員들의 司會拒否事態를 빚기도 한 것이 中宮의 雙官運에서 六十九歲와 七十一歲 사이로서 共和黨政府의 終末과 官運을 함께 한 셈이 된다.
아무튼 氏의 官僚로서의 行脚이나 政治人으로서의 行脚이 色彩야 어찌됐건 韓國現代史를 點綴한 한 人物임엔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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