素石 李哲承{429} 壬戌五月十五日
政黨을 하나의 合唱團에다 比한다면 團員 한 사람 한 사람이 제各己 聲色이 다른 소리를 내면서도 하나의 和音을 이루는 것과도 같이 政黨人 한 사람 한 사람이 各己 自己 所信에 立脚하여 色相이 다른 소리를 얼마든지 외칠 수 있어야만 되지 않을까 한다.{430}
어떤 한 議題를 놓고 百人百出의 異論이 續出할지라도 일단 그것을 모두 收斂하여 甲論乙駁의 討議를 거친 다음 衆知를 모아 黨論을 決定하는게 政治의 常道이거늘 오늘의 野黨街에선 宗主 한 사람의 敎旨를 놓고 無批判的인 復命 復唱만을 强要하는 나머지 이를 是라하는 者는 同志가 되고 非라 하는 者는 叛徒로 몰아붙여 懲戒가 아니면 除名으로 逐出해버리는 非情한 破局에서도 自己保身엔 秋毫도 念慮않은 채 할 소리 못할 소리 마구 쏟아놓고서도 활개치고 다니는 뱃심 좋은 議員님이라면 素石밖에 누가 또 있겠는가.
그러기에 素石만큼 口舌數를 많이 타고난 사람도 없을 것 같다.
하기야 우리의 野黨史를 돌이켜 볼 때 政治信念이 確固하고 所信이 透徹한 指導者 쳐놓고 誤解 안 받고 辱 안 먹은 사람이 있었던가.
維石이 그랬고 玉山도 그랬듯 素石도 그 가운데 한사람이라 生覺하면 맘 편할 것이다.
아무튼 素石도 自信의 政治生命이 存續하는 限은 그 旺盛한 입심도 如前하리라 보고 또 如前하기를 바란다.
사람은 公人이든 匹夫든 간에 언제나 自己답게 사는 게 가장 人間답게 사는 것이기에 말이다.
素石의 如斯한 素地가 모두다 卽興的인 演出이거나 瞬間的機智로 創出해내는 一時的 제스추어가 아닌 바로 말해서 四柱八字에 타고난 바탕에서 起因됨을 읽을 수가 있다.
論旨가 엉뚱한 方向으로 많이 흘렀는데 이제 本論으로 돌아와서 八字評論을 해보기로 하자.
素石의 四柱命局은 한마디로 말해 어느 한군데 막힘없는 四通八達의 四柱다.{431}
歲生中에서부터 始作한 成局은 日支에서 마감을 했지만 日支가 다시 月支를 生하고 月支가 다시 時支를 生하니 時支는 다시 歲支와 連結되어 마치 念珠를 꿰매어 놓은 듯하다. 水日支가 居生 乘旺에 中助歲하므로 太旺하다.
歲官이 中印과 官印相生하여 名譽가 높고 月孫이 時財를 刑하므로 威嚴 또한 赫赫하다.
바탕은 怨嗔인데 日支가 非怨嗔에 들고 歲時의 財官이 生怨嗔이라 凶中有吉하고 己身이 太旺하니 百害가 不侵이라 懸河의 口辯은 一席을 壓倒하기에 不足함이 없어 氏가 萬若 勝時에 寄寓하여 功名을 貪했던들 三公의 班列은 몰라도 六曹의 地位는 누렸으련만 하필이면 歲官이 空鄕에 떨어져 不世出의 奇才가 無爲하게 一生을 보내고 말았으니 可惜한 노릇이지만 그도 亦 八字의 歸結이라 아니할 수 없다.
氏의 二十代는 反共運動에 앞장서서 그 鬪爭的成果가 大端했으니 遊年 또한 十九歲에서 二十四歲가 財生官하므로 名聲을 振動할 數요 二十五歲에서 三十二歲 그리고 三十三歲에서 三十六歲까지가 中宮 印綬運이라 이 또한 大發하는 運勢로서 拾萬選良에 뽑혀 民意의 代辯者가 되었고 三十七歲와 四十五歲는 乾上 太歲宮의 正官運에서 空亡을 맞으므로 落名과 官刑을 입을 數였다.
氏가 第一野黨의 總帥가 된 것은 遊年 五十二歲와 五十八歲사이의 乾上官宮의 休門과 天甫宮에서였는데 上爻가 偏財數로서 地盤의 官星을 助하여 野黨代表자리 까지는 올라갔으나結局 空地라 얼마 못가서 내놓고 말게 되었다.
現在의 遊年은 六十二歲부터 七十歲까지 巽上의 九金 偏印運에 떨어져 實益은 殆無하지만 그래도 名聲은 있을 수나 死門歸魂과 天心直符等을 만나고 또한 甲加丙은 靑龍回首로서 君臣會座格이나 吉凶이 相半之勢다.{432}
아무튼 이 정도의 旺吉한 運勢를 만났으므로 그만큼 自身있는 所信을 吐露할 수 있지 않나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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